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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더좋은민주주의연구소] 그들이 슬퍼할 수 있도록 - 세월호 트라우마와 공동체의 과제

 

 

“단 한 명의 인명 피해도 발생하지 않도록 하라”(대통령 박근혜 2014-04-16 am 10:00), 그 말이 무참합니다. 295명이 죽고 9명이 아직 실종된 상태입니다. 생명 하나 구하지 못한 채 고스란히 죽어가는 과정을 우리 모두는 TV 생중계로 바라봐야 했습니다. 우리들에게 남겨놓은 영상들 속 아이들은 하나같이 너무나도 천진스럽고, 희망적이었습니다. 이 땅의 어른으로서 봄 수학여행에 들떠있을 그 또래,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고개를 들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죄책감으로 밤을 지새웠습니다. 반성도 했습니다. ‘국가는 어떠해야 하는가’를 수없이 되묻고 방향을 찾아야 한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1년이 지났습니다. 하지만 1년 뒤 현실은 애도와 치유는 고사하고 여전히 상처투성이입니다. 유가족들은 상복을 입고, 삭발을 하고, 영정을 들고 광화문까지 걸어와 진실을 규명해 달라고, 세월호를 인양해달라고, 돈으로 능욕하지 말라고 호소합니다. ‘너희들을 잊지 않겠다’던 시민들의 발길이 뜸해져 광화문 광장은 텅 비어 갑니다. ‘대한민국은 안전하다’고 자라나는 세대들을 뒷받쳐줘야 할 정치는 대안과 해결책을 제시하기엔 무능합니다. 시민들은 정치에 대해 더욱 더 냉소적입니다. 

치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고통에 대한 공감이고 불행에 대한 연대입니다. “금요일에 돌아온다”며 수학여행을 떠난 아이들이 차가운 물속에서 죽어 갔을 때, 그 것을 지켜 본 우리 모두에게는 야스퍼스가 말한 “정치적 죄, 도덕적 죄, 형이상학적 죄”가 있습니다. 그 참사를 막지 못한 정치적 책임, 돈이 먼저라는 성장 제일주의에 편승한 도덕적인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남은 자로서, 죽은 자에 대한 연대감을 가져야만 합니다. 하지만 현실 은 다릅니다. 진실규명에 한 걸음도 내딛지 못했는데, 그 터져버릴 것 같은 유족들의 심장 앞에서 ‘1인당 얼마’라며 돈을 흔들어댑니다. 우리 사회의 공감 능력(empathic capacity)은 세월호 희생자들을 위로하기는커녕, 오히려 상처를 키우고 있는 것입니다. 

유가족들은 진실규명을 위해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을 폐지하라고 요구합니다. 부모한테 매를 맞아도 왜 맞는지 알아야 맺힌 게 없게 됩니다. 죽지 않아야 할 아이들이, 왜 제대로 구조되지 못했는지 알 권리가 유족들에게 있습니다. 진상규명 없이 제대로 된 치유는 불가능합니다. 진실을 알 권리는 피해 당사자만이 아니라 사회 공동체 전체의 권리이기도 합니다. 우리 공동체 또한 진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진실을 아는 바로 그 지점에서 세월호 피해자는 물론 우리 공동체의 치유도 한 발짝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는 ‘세상이 안전하다’는, ‘자기가 가치 있다’는, ‘사회질서가 의미 있다’는 기본적인 가정들이 근저에서 무너지는 경험입니다. 파국적 상황입니다. ‘가만히 있으라’는 기성 질서에 따른 결과가 수많은 죽음으로 나타났습니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야 될 최후 보루인 국가는 무능력 했습니다. 이 세상은 더 이상 안전하지 않고 신뢰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래서 세상이 신뢰할 만하고 안전 하다는 믿음이 있어야 치유는 가능합니다. ‘안전한 환경’은 치유의 전제 조건입니다. 공동체가 나서서 우리사회를 안전과 존엄 있는 사회로 바꾸고, 다시는 이런 일을 되풀이 하지 않겠다고 ‘재발 방지’를 다짐해야 합니다. 안전한 환경에서 치유자와 신뢰할 수 있는 동맹관계를 형성 할 때 비로소 치유를 시작 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이런 과정을 통해 피해자들은 단순한 희생자에 머물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이들을 잃었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사회의 안전과 존엄을 되돌아보고 바로 잡았다면 의미 있는 죽음으로 다시 자리매김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명예 회복’ 이고, 죽음 가운 데 공동체가 이루어 낸 ‘외상 후 성장’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개인의 몸과 마음 전 존재가 새로운 관계 속에서 회복되는 것이 치유입니다. 사회와 공동체에게는 그 참사를 일으킨 구조와 원인들을 제거하여 공동체 전체의 안전과 공공성을 강화하는 것이 치유의 과정일 것입니다.  

아침 출근할 때마다 광화문 농성장을 지납니다. 그 사이 벚꽃은 졌고, 프란치스꼬 교황님은 다녀가셨고, 광화문 거리는 단풍 물이 들었고, 그리고 눈이 내렸습니다. 그리고 또다시 벚꽃이 피었지요. 하지만 그 1년 동안 유족들의 요구는 거의 변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변할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리도 매몰차기만 할까요. 유족들은 느닷없는 가족의 죽음 앞에서 충분히 애도하고 슬퍼해야 합니다. 그래야 죽음들을 떠나보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1년이 다된 지금까지도 유족들이 죽음을 애도할 수 있는 조건조차 만들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돈으로 모욕합니다. 세월호 참사는 ‘국가의 부작위’에 의한 희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배상은 정의를 성취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라고 합니다. 진실이 규명되지도 않았는데, 배상운운 하며 사망자 1명당 얼마라고 계산을 들이미는 것은 자식 잃은 부모의 마음을 전혀 어루만지지 못해서 생긴 일입니다. 배상은 피해자의 정당한 권리로, 피해자의 고통의 본질을 이해하고, 진실규명의 토대위에서 책임지고, 최대한 유족들을 배려해야만 합니다. 배(보)상금 지급 문제는 바로 우리 사회의 품격과 연결되는 문제입니다. 돈보다 사람의 마음과 그 가치가 더 소중합니다. 보상 문제에서도 공동체가 끝까지 지키고 고수해야 할 방향은 바로 이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유가족들이 충분히 슬퍼할 수 있도록, 진심으로 애도할 수 있도록 인간에 대한 모멸과 야만을 그만 두어야 합니다. 트라우마의 치유는 공동체의 시민이 세월호 유족들이 하는 말과 그 고통에 귀 기울이는 공감에서 시작 합니다. 하지만 현재 상황은 애도할 수 있는 여건 자체가 안 됩니다. 가족들은 정부와 세월호 참사를 비하하고 진실을 왜곡하는 일부 사람들에 대항하는 것만으로도 벅차고 힘들 것입니다. 세월호 참사 1년이 된 지금, 유가족과 생존자들이 슬퍼할 여유조차 없이 길거리로 내몰린 현실에 참담함을 느끼게 됩니다. 유가족들이 슬퍼 할 수 있도록, 304명의 사람을 떠나보낼 수 있으려면 진실이 제대로 밝혀지고, 책임자가 처벌되어야만 합니다. 진정한 애도를 시작할 수 있도록 우리 사회 모든 구성원이 유가족들의 목소리에 다시, 귀 기울여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다시, 잊지 말자고 말할 때입니다. ‘잊지 말자’고 하는 것은,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흘러도 도무지 잊혀지지 않는 기억, 그 고통스런 기억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이들에 대한 깊은 연대의식입니다. 또한 잊지 말자는 것은, ‘잊으라’ 하는 것, 잊혀지기를 바라는 것에 대한 저항이기도 합니다. 기억은, 우리 공동체가 피해자의 고통과 슬픔을 현재화하여 기념하고 추모하는 일입니다. 망각에 맞서 올바로 기억 할 때만이 우리는 참사를 되풀이 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집앞, 담쟁이가 푸르른 싹을 내밀었습니다. 겨우내 또아리를 틀고 있던 나무둥지에서 하나 둘 솟아나는 이파리입니다. 그 담쟁이를 보며 단원고 한 학생이 수학여행 전 엄마에게 했다는 말이 떠오릅니다. “엄마하고 나는 서로 연결되어 있어.” 그 말을 평생 가슴에 묻고 살아야 할 그 엄마를 떠올리는 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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