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썸네일형 리스트형 강용주 광주트라우마센터장 - Tine Thing Helseth - Mitt lille land / Laleh - Some Die Young (22.7.12) Tine Thing Helseth - Mitt lille land / Laleh - Some Die Young (22.7.12)이 노래는 노르웨이 우토야섬 희생자를 위한 트렘펫 곡이다. 1주기 추모제에서 연주된. 유튜브 화면의 하트는 oslo + love = oslove다. 테러를 딛고 일어나 기억과 추모 그리고 삶이 계속되는 상징이다.2011년 7월 노르웨이에서 정부 청사을 폭파하고, 오슬로 인근 우토야 섬에서 청소년들을 무차별 총격해 77명을 살해한 테러범 브레이빅은 자신이 존경하는 인물 5명중 한명으로 MB를 들었다. 노르웨이의 이민정책과 포용적 다문화에 불만이었는데, MB는 이민정책에 엄격하고 이주민에 불포용적이고 단일민족을 강조하기 때문이라나... (월간 참여사회 4월호-이채훈 MBC 해직 PD.. 더보기 평화의 소녀상’ 따라 무소의 뿔처럼 - 광주트라우마센터장 강용주 광주트라우마센터장 강용주 칼럼 “큰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이 / 물에 젖지 않은 연꽃같이 / 저 광야에 외로이 걷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수타니파타’) 광주트라우마센터장 강용주 일본 대사관앞. 12월30일, 올해 마지막 수요집회가 열렸습니다. 1211차 수요집회는 올 한 해 세상을 떠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아홉 분의 넋을 기리는 추모회였습니다. 정부에 등록된 피해자 238명 가운데 이제 단지 46명이 살아계십니다. 그 자리에서 이용수 할머니는 “우리들한테 얘기 한번 듣지 않고 일본에 법적 책임을 면해주고 소녀상 철거에 대해 검토까지 해주겠다는 사람들이 과연 우리나라의 공무원인가”라고 말했습니다. 반인도적 범죄를 해결하기 위한 국제사회의 원칙이 있습니다... 더보기 [더좋은민주주의연구소] 그들이 슬퍼할 수 있도록 - 세월호 트라우마와 공동체의 과제 “단 한 명의 인명 피해도 발생하지 않도록 하라”(대통령 박근혜 2014-04-16 am 10:00), 그 말이 무참합니다. 295명이 죽고 9명이 아직 실종된 상태입니다. 생명 하나 구하지 못한 채 고스란히 죽어가는 과정을 우리 모두는 TV 생중계로 바라봐야 했습니다. 우리들에게 남겨놓은 영상들 속 아이들은 하나같이 너무나도 천진스럽고, 희망적이었습니다. 이 땅의 어른으로서 봄 수학여행에 들떠있을 그 또래,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고개를 들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죄책감으로 밤을 지새웠습니다. 반성도 했습니다. ‘국가는 어떠해야 하는가’를 수없이 되묻고 방향을 찾아야 한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1년이 지났습니다. 하지만 1년 뒤 현실은 애도와 치유는 고사하고 여전히 상처투성이입니다... 더보기 [법보신문] 24년만의 무죄 판결, 강기훈과 검찰 “원한를 은덕으로 갚으면 어떻습니까?(以德報怨)” 어떤 이가 공자에게 물었다. 공자가 답했다. “그렇다면 은덕은 무엇으로 갚겠느냐. 정의로써 원한를 갚으며, 은덕으로서 은덕을 갚아야 하느니라.(以直報怨, 以德報德)” 논어 ‘헌문’에 나오는 이야기다. 1991년 강기훈씨가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씨의 분신을 사주하고 유서를 대신 써줬다는 ‘유서대필 사건’을 아시는지. 부패와 부정, 3당 합당으로 위기에 몰린 노태우 정권이 위기타개책으로 조작한 사건이다. 6월 민주항쟁 등을 통해 자유, 평등, 인간애, 생명, 권리, 여성 등 ‘사람다운 가치’들이 강화되고 넓어지다가 이 사건을 계기로 거꾸로 역전되어 ‘보수 반동’의 역류가 몰아친 결정적인 사건이다. 지난 5월14일 대법원에서 재심 무죄 확정판결을 선고했다. 2.. 더보기 [법보신문] 국민행복, 대한민국' 그리고 우리의 민낯 요즘 아침마다 광화문 광장에 나간다. 겨우 커피 한잔 들고 진실규명을 가로 막는 특별법 시행령 철폐를 주장하며 농성중인 이석태 세월호 특별 조사위원장을 보러간다. 광화문에 가면 4.16참사 이후 가장 많은 인원인 250여명의 유가족들이 상복을 입고 삭발한 모습으로 1박2일 걸어서 광화문에 왔던 지난 4월 초의 슬픈 모습이 겹쳐진다. 유족들이 영정을 들고 광화문 광장에 모인 뒤편의 정부 종합청사에 걸린 ‘국민행복,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플래카드는 바람에 반쯤 찢어져 너덜거리고 있었다. 세월호 가족들을 지원하기 위한 배보상이 확정되었지만 정작 유가족들은 반발하고 있다. 돈으로 능욕하지 말라고 호소한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모욕감을 느끼는 것은 왜일까? 누군가와 돈을 주고 받을 때 마음 상하는 일을 한번쯤 경.. 더보기 [법보신문] 그들이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세월호 참사 1년이 다 돼 가는데 실종자 아홉 사람은 여전히 바다 속에 있다. 세월호 선체 인양은 진상규명을 위해 필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실종자 아홉 사람이다. 두고 온 가족에게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도, 떠나간 가족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도 원초적인 본능이다. 이 본능이 좌절될 때, 상처입은 사람들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국전쟁 전사자 유해를 발굴하는 미군들의 부대 휘장엔 “그들이 집으로 돌아 올 때까지”라고 써있다. 그들은 최후의 한 구까지 최선을 다해서 찾겠다고 다짐한다. 전사한 군인들을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는 게 국가의 마땅한 의무여서일 테다. 하지만, 죽은 자들을 야산에 버려두지 않고 십년이고 이십년이고 샅샅이 뒤져서 거두는 것은 ‘죽은 자에 대한 의무’, 인간다움의 가장.. 더보기 [법보신문] 4월에 겪을 세월호 증후군 “스스로 악을 행하면 스스로 더러워지고, 스스로 선을 행하면 스스로 깨끗해진다“ ‘법구경’ “잊지 않겠습니다.” 햇빛 찬란한 4월이면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1년이 된다. 많은 시민들이 세월호 희생자들을 가슴에 담고 고통과 아픔을 함께 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일베 회원들이 세월호 희생자들을 ‘오뎅’으로 비하, 유족들에게 상처를 입혔다. 진상 규명을 위해 만든 세월호 특위는 ‘세금도둑’이라는 억지에 발목 잡혀 한걸음도 나가지 못했다. 트라우마의 ‘기념일 반응(Anniversary reaction)’이란 게 있다. 미국의 9·11이나 제주의 4·3처럼 충격적인 사건을 겪은 사람들은 그 일이 일어난 시기가 되면 심리적으로 힘들어한다. 고(故) 김근태 선생 같은 고문 피해자는 자신이 고문당한 시기가 다가오면.. 더보기 [법보신문] 프랑스의 민낯, 한국의 민낯 ‘쇠에서 나온 녹이/ 쇠를 먹어 들어가듯/ 자신이 저지른 악업이/ 자신을 나쁜 세계로 끌고 간다.’(법구경) 지난 1월7일 프랑스 주간지 ‘샤를리’ 테러가 일어났다. 테러범들은 프랑스 국적 이민 2세 청년으로, ‘샤를리’ 만평이 이슬람교를 모독했다며 테러를 자행했다. 이슬람에서는 성자 무함마드의 형상을 그리거나 조각하는 것조차 신성모독으로 여긴다. 무함마드가 누드화 같은 성적인 내용으로 풍자된 사실에 대다수 무슬림들은 마치 영적인 살인을 당한 느낌이 든다고 한다. 그런 모욕감을 느낀 일부 무슬림 청년이 이 같은 야만적인 테러를 벌인 것이다.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문명의 충돌’을 운운한다. 하지만 사태를 살펴보면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샤를리’ 테러 사건 때, 언론사를 지키려다 숨진 경찰관 아흐메드.. 더보기 [법보신문] 증오범죄'를 넘어서는 법 “분노하는 뭇 삶들은 분노로 인해 나쁜 곳으로 간다. 그 분노를 올바로 알아서 통찰하는 자는 끊어버린다.”(이티부타카) 우리 사회도 ‘증오범죄’가 일반화되기 시작한 걸까? 얼마 전 재미동포 신은미씨와 황선씨의 토크콘서트가 열리던 전북 익산의 한 성당에서 사제폭탄이 터졌다. 2명이 화상을 입었고 청중 200여명이 긴급 대피를 했다고 한다. 범인은 10대 고교생 오모군이었다. “북한이 지상낙원이라고 했습니까?” 그 고교생은 신은미씨가 하지도 않은 말을 물은 뒤, 폭탄을 던졌다. ‘증오범죄’라 할 만하다. ‘증오범죄’란 범죄의 동기가 인종·종교·국가·성적취향·사회적 계층·연령·장애·경제적 지위 등에 따른 편견과 증오에서 발생한 것을 말한다. 그동안 인터넷에서는 일베를 중심으로 특정 성별이나 지역, 이념을 문제.. 더보기 [100년편지] 심산 아니 벽옹! 김창숙 선생님 -강용주- 살아있는 무덤’인 대전교도소 15사에서 비전향을 선택한 것은 무엇보다도 광주 시민을 학살한 전두환 정권에게 반성한다고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지요. 폭력과 강제에 굴복하지 않겠다고 ‘비전향’을 선택하고 마침내 13년 9개월만인 1999년 2월 ‘준법서약서’도 쓰지 않고, ‘최연소 비전향 장기수’로 세상 속으로 돌아 올 수 있었던 데는, 내가 만난 ≪김창숙≫이 있어요. 고문으로 두 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하여 스스로 ‘앉은뱅이 늙은이’ 벽옹(?翁)이라고 부르셨지요. 그 ‘벽옹’이 있어 ‘비전향’의 의미를 더 구체적이고 새롭게 이해하고 느낄 수 있었어요. http://korea100.kr/tc/238?category=0 더보기 이전 1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