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용주를 다시 만났다
지난 9월 22일, 나는 광주에 가는 길에 강용주를 다시 만났다. 그의 어머니 조순선씨도 함께인 자리였다. 5 년만이었다. 이제 그는 43살, 어머니는 79살이 되었다. 어머니의 말대로 그는 23 년만에야 의대를 졸업하고, 이제 인턴으로서 나주의 한 병원에 근무하고 있다.
사실 그와 나는 겨우 네 번째의 만남이었고, 그것도 세 번은 1999년 2월과 3월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5 년만에 처음 만난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가, 아주 어린 시절 꾀를 벗고 알아온 '꾀복쟁이' 친구처럼 가깝게만 느껴졌다. 오랜 학교 공부하는 데 힘들지 않았냐니까, 예의 '나이 영치론'을 들고 나온다.
"나이 먹은 체 하면 요즘 애들이 안 끼워주잖아요. '왕따'되는 거죠. 그런데 저는 14년 동안 나이를 안 먹었잖아요. 그래서 요즘 애들과 정신 연령이 맞아요, 하하."
광주 시내에서 무등산을 끼고 30 분을 차로 달려 도착한 담양의 한 찻집에서 우리는 차를 마셨다. 5 년 6 개월 전 그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주목받는 양심수 중의 한 명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는 43살의 나이에 이제야 인턴으로 근무하고 있다. 그 날도 전날 야근하고 아침 9시에 퇴근했다고 했다.
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가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99년 3월에 만났을 때 그는 나에게 자신의 진로에 대해 의견을 물었었다. 지금까지 해온 일도 있으니 인권운동가로서 계속 일을 해 나가는 것도 하나의 삶이고, 또 하나는 복학해서 늦깎이 의대생으로 공부를 하는 것도 하나의 길인데 어느 길이 더 나은 길인지 고민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 그에게 반문했다. 어떤 길이 더 어려울 것 같냐고. 그는 의대에 복학하는 것이 당연히 더 어려울 것이라고 답했다. 내 대답은 이것이었다. "그러면 더 어려운 길을 가세요. 내가 생각할 때 용주씨는 어려운 길을 가도록 되어 있는 사람같아요."
내 대답은 진심이었다. 인권운동가의 길을 가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리고 그는 그 일을 누구보다도 잘 해 낼 것이었지만, 그의 삶이 단지 '인권운동가'로 규정되는 것보다는, 의사로서 인권운동을 하는 것이 인권운동이라는 차원에서도 폭과 깊이를 더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었다. 또 하나, 그가 알면 나에게 화를 낼지 모르겠지만, 지독히도 가난하게 살아왔다는 것을 아는 나로서는 그에게 가난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 그가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어머니는 성치 않은 다리를 끌고 민가협의 모임에 단 한번도 거르지 않으셨다. 이젠 그 어머니를 위해서 아들도 뭔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강용주는 어디에 있든 자신의 신념을 저버리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그것이다. 그것은 어머니도 원하는 바일 것이다. 강용주가 의대에 입학했을 때 어머니가 아들에게 들려준 이야기가 있다.
"아무리 밤중이라도 병원 문 두들기는 사람 있으면 꼭 열어 주어라. 아무리 먼 곳이라도 네가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든 가라. 아무리 돈 없는 사람이라도 아프다면 꼭 치료해 주어라."
생각난 김에 강용주가 아직 옥중에 있을 때, 두 모자가 나누었다는 이야기를 여기에 옮겨 두자. 99년 어머니가 내게 들려주신 이야기이다.
"전향이라는 게 뭔지 아무 것도 모르고 용주에게 전향을 권한 적이 있었어요. '용주야, 전향을 하면 많이 살면 3년 살고 광주로 보내준단다. 전향을 해야겠다.' 그러니까 얘가 성질을 내면서 '어머니, 그런 소리 할려면 다시는 면회도 오지 말라'면서 면회도 안 하고 그냥 들어가 버렸어요. 전향이 도대체 뭐길래 얘가 그러나… 그 후로는 그 말을 입에도 안 냈어요. 99년 8월 특사 때 준법서약서만 쓰면 나온답디다. 면회를 갔는데 내 입으로는 절대 준법서약서 쓰란 말이 안 나옵디다. 그래서 '용주야, 준법서약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봤어요. 물어보니까 걔가 하는 말이 '어머니, 오래오래만 살아달라'고 그래요. 그 말은 안 쓰겠다는 말이거든요. 그래서 '너는 나한테 오래오래만 살아달라고 하지만도 저승에서 부르면 가야될 거 아니냐? 그때까지 내가 어떻게 기다리냐'고 하니까 용주가 하는 말이 '어머니는 절대 안 돌아가신다'고 그래요. 그래서 '오라 하면 가야지, 내가 안 갈 수는 없는 곳이다. 그곳은 오라 하면 가야 되는 곳'이라고 했더니 또 하는 말이 '우리 어머니는 절대 안 돌아가신다'고 또 그래요.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그래, 아무리 저승사자가 와서 끌고 간다고 해도 나는 안 갈 거구마'하고 내가 그랬어요."
한 시간 정도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다음 약속 때문에 나는 그에게 작별 인사를 해야 했다. 그는 또 14살이나 어린 30살의 청년처럼, 카메라폰을 꺼내더니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나중에 오시면 우리 꼭 소쇄원에 가 봅시다. 오전 11시쯤이 가장 좋답니다."
금방 보자고 해놓고 5 년이나 걸렸으니, 이 다음 '나중'은 또 몇 년이 될지 모른다. 하지만 5 년 전과 다름없는 청년을 보았듯이, '나중'이 언제이든 그는 여전히 청년으로 남아 있을 거란 생각에 섭섭함보다는 흐뭇함이 가슴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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