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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강용주의 '인권광장'] 인류의 가장 아름다운 약속 - 세계인권선언

12월 10일. ‘인류의 가장 아름다운 약속’이라는 세계인권선언이 만들어진 지 67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1948년 유엔 총회는 홀로코스트 같은 인류 역사상 가장 야만적인 범죄들이 벌어진 2차 세계 대전을 반성합니다. 세계인권선언문은 그 결과로 태어났지요. ‘인권에 대한 무시와 경멸이 야만적 행위를 야기’했다는 성찰과 ‘언론과 종교의 자유, 공포와 결핍으로부터의 자유를 인류 전체가 누릴 수 있는 세상’이 도래하길 바라면서요.

세계인권선언과 관련한 잊지 못할 ‘추억’이 하나 있습니다. 2008년, 세계인권선언 60주년이 되는 해였지요. 유엔은 ‘Know Your Rights 2008’ 캠페인을 전개하였고, 세계적으로 축하 행사가 잇따랐습니다. 우리나라도 ‘세계인권선언 60만 읽기 캠페인’ 같은 다채로운 행사들이 열렸지요. 국가인권위원회는 ‘세계인권선언 60주년 기념 특별 홍보 대사’를 위촉했습니다.

‘먼 나라 이웃 나라’를 그린 덕성여대 이원복 교수, 패션 디자이너 앙드레 김. 그리고 저도 그 중 한 명이었습니다. 으레 유명 인사나 연예인이 맡아 온 홍보 대사에 ‘비전향 장기수’인 저를 위촉한 까닭이 무엇이었을까요? 60주년을 맞아, 우선 우리 사회의 인권을 위해 노력해 온 사람을 홍보 대사로 위촉하자는 여러 분들의 추천 끝에 저를 선정했다고 합니다. 양심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비전향 장기수로 14년을 복역하고 석방된 후에도 보안관찰법과 싸우고 있는 제 삶이 우리나라의 인권의 바닥을 다지고 그 지평을 넓혀 왔다고 평가한 거지요.

하지만 홍보대사 위촉식 일주일 전에 식이 갑자기 연기되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이명박 정권 출범 이래 국가인권위원회의 독립성이 훼손되고, 공공연히 색깔 덧씌우기를 하던 때였습니다. 앙드레김이 “국가인권위원회가 좌파 조직이어서 주변에서 반대한다”며 인권 홍보 대사를 안 하겠다는 게 그 이유였습니다. 연기된 위촉식을 차일피일 미루더니 결국은 못하고 말았습니다.

한참 후, 위촉패가 우편으로 배달돼 왔습니다. “세계인권선언 60주년을 맞아 귀하를 국가인권위원회 특별인권 홍보 대사로 모십니다. 귀하의 열정과 헌신이 우리사회의 인권 감수성을 향상시키고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드는 데 큰 힘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딱 거기까지였습니다. 홍보 대사란 그 사람의 사회적 이미지를 가지고 많은 시민들에게 인권위를 알리고 참여하도록 적극적으로 홍보 활동을 하는 게 그 역할일 텐데, 국가인권위원회는 그 이후 단 한 번도 저를 앞세우지 않더군요.

세계선언을 60만 명이 함께 읽자는 캠페인을 하면서도 초대하지 않았습니다. “제5조: 아무도 고문이나 가혹하거나 비인도적이거나 모욕적인 처우 또는 형벌을 받지 아니한다.” “제18조: 모든 인간은 사상, 양심, 종교의 자유를 누릴 권리를 갖는다.” “제19조: 모든 인간은 의견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누릴 권리를 갖는다.” 제가 오래도록 주장해 왔던 조문인데도 함께 읽을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2010년 6월 국가인권위원회는 감사패를 보내왔습니다. ‘세계인권선언 60주년 기념 특별 홍보대사’로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 줘서 감사하다는 뜻인 게 분명했습니다.

인간이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라는 사실은 선언적으로는 맞지만 현실은 그 반대인 경우가 많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결코 빼앗을 수 없는 권리가 있고 그 권리는 누구에게나 적용된다고 말하지만 사회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자주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평화적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누릴 권리’(제20조)가 있어도 차벽이 가로막고 복면 시위를 금지하는 현실. ‘모든 인간은 생명권과 신체의 자유와 안전을 누릴 권리’(제3조)가 있지만 시민이 물대포를 맞아 사경을 헤매도 누구 하나 사과하지 않는 공권력. ‘모든 인간은 의견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누릴 권리’(제19조)가 있다는 조항을 비웃듯 ‘세월 오월’같은 예술작품을 못 걸게 하는 인권도시. ‘그 어떤 종류의 구별도 없이 모든 권리와 자유를 누릴 자격’(제2조)이 있는데도 성적 소수자에 대해 “인권도시 광주에서 동성애가 웬 말이냐?”며 인문학 강좌마저 방해하는 행정력….

혼돈과 어둠 속이더라도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성과 권리에 있어서 평등하다”(제1조)는 그 약속만은 새벽별처럼 더욱 또렷해집니다. ‘인류의 가장 아름다운 약속’인 세계인권선언을 가슴에 새기며 또 한 발짝 걸음을 내딛습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향해 뚜벅뚜벅.



< 광주트라우마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