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센터 썸네일형 리스트형 [인물과 사상사] 강용주: 국가폭력에 대한 저항자 혹은 치유자 그의 삶이 곧 국가폭력에 대한 저항이다 거대한 국가폭력 앞에서 악법에 불복종으로 맞서다 고문피해자 치유에 나서다 사람 중심의 가치가 구현된 사회를 위하여 http://www.dbpia.co.kr/Article/NODE02259024 더보기 [전라도닷컴]자신의 상처를 통해 시대의 상처를 보듬다 광주트라우마센터장 강용주 고문을 통해 간첩누명을 쓰고, 청춘을 감옥에 반납한 깊은 상처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상처를 통해 남의 상처, 시대의 상처를 보듬는 힘을 얻었다는 의사 강용주. 지난 해 가을 광주에 설립된 트라우마센터의 운영을 맡고 있는 그는 ‘상처받은 사람들의 치유’와 ‘시스템의 치유’는 정치 경제 역사의 모든 문제를 ‘사람 중심’으로 바라볼 때 가능한 일이라고 말한다. “민주정부가 들어서고도 15년이 지난 후에야 치유사업이 시작됐다는 사실은 부끄러운 일이죠. 고통 받은 이들의 아픔을 생각지 않는 과거청산은 말이 안 되는 일 아닙니까. 지역 대학들과 연계하거나 사회의 전문가들과 연계해서 치유센터로서 전문성을 강화시켜 나가야 하고, 전문성 담보를 통한 독립적 운영 등 아직 숙제가 많습니다. 영국의 경우에는 난민들을 위.. 더보기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이 만난 사람 : 우연한 개인- 광주트라우마센터장 강용주 “그때 광주는 해방의 공동체였지만 다른 의미로는 고립된 트라우마의 공동체, 상처의 공동체였지요. 이제는 이곳이 치유의 공동체로 발전해야 한다는 의지의 표현이 이 센터입니다. 국가폭력 피해자에 대한 치유에는 당사자와 가족뿐만 아니라 공동체 전체도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세계 여러 나라에서 이미 나와 있습니다.” 강용주 씨는 국가폭력의 피해자를 ‘국가라는 괴물에게 덥석 물려버린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이 불운한 피해자들은 폭력의 주체가 국가라는 점에서 심리적 충격을 더 크게 받게 된다. 또한 지속되는 공권력의 감시와 통제뿐만 아니라 주위로부터의 분리와 사회적 정의에 대한 불신과 분노의 감정은 더 무겁게 옥죄어 안으로 숨어들게 만든다. 현재 센터는 개인과 가족, 집단을 대상으로 심리 상담과 물리치료를 포.. 더보기 [오마이뉴스] 영화 <26년>과 '시민군' 강용주 광주트라우마센터소장 '광주트라우마센터 소장'이라는 강용주 소장의 명함은 최근 새로 생겼다. 18일 문을 연 광주트라우마센터는 일반적인 정신보건센터역할에 그칠 뻔했지만, 광주시의 도움으로 '치유의 공간'으로 거듭났다. 강 소장은 "고문이나 학살을 겪은 후 그 현장에 영혼이 갇혀버린 분들의 아픔과 고통을 치유하는 데에 우리 사회가 너무 소홀히 해왔다"며 "늦었지만 이제라도 시작하게 되어 다행"이라고 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93750 더보기 [news1] 광주시청자미디어센터, 26일 강용주 광주트라우마센터장 특강 1962년 광주출생인 강용주 광주트라우마센터장은 1980년 5월 고교 3학년 재학중 광주민중항쟁 참여, 1985년 구미유학생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최연소 비전향 장기수로 14년간 복역했다. 이후 2008년부터 현재까지 고문피해자치유모임인 '진실의 힘'과 UN 고문피해자 지원의 날 기념대회 조직에서 활동중이다. http://m.zum.com/news/society/3778907 더보기 [프레시안] 최연소 비전향 장기수, 그의 마르지 않은 눈물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4647 강용주 광주 트라우마 센터장 마지막 순간 두려움에 총을 버리고 도망갔던,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에 어쩔 줄 모르던 그 고교생이 고교 선배에게 학생운동, 노동운동, 민주화운동에 관한 자료를 주었다는 이유로 85년 구미유학생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우리나라 최연소 장기수이자 세계 최연소 무기수가 되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사면을 받고 나오는 순간에도 전향서에 사인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세상에 나오지 못했다. "전 향하지 않았던 이유는 단순했다. 간첩사건이 조작이라 인정할 수 없었고 재판과정에서 변변히 항변해 보지 못한 것이 억울했다. 또한 전두환 정권이라는 광주 민주화의 학살자들에게 또다시 반성한다고 할 수는 없었다. 고.. 더보기 광주가 기억하는 그 이름, 강·용·주 '강용주' 광주트라우마센터장 되어 ‘광주 치유’에 나서다 스스로를 ‘상처 입은 치유자’라 말했다. 고문, 감옥살이, 간첩 낙인으로 온갖 사회적 차별을 견뎌낸 중요한 경험, 그래서 같은 고통을 당한 이들에 대한 공감이 고문생존자인 자신이 치유자에 적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폭력보다 인간이 더 강하다는 사실을 삶으로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선뜻 이 자리에 나섰다고도 했다. 전 세계 트라우마센터는 200여개. 특히, 우리나라처럼 국가권력에 맞서 민주주의를 세운 남아공화국도 현재 2∼3개의 트라우마센터를 운영 중이란 게 그의 설명이다. 국가폭력 피해자에 대한 명예회복, 배상, 기념사업도 중요하지만 피해를 당한 인간에 대한 치유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늘 생각해 왔던 그에게 늦었지만 지금에라도 광주가 발 벗고.. 더보기 [강용주의 '인권광장'] 인류의 가장 아름다운 약속 - 세계인권선언 12월 10일. ‘인류의 가장 아름다운 약속’이라는 세계인권선언이 만들어진 지 67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1948년 유엔 총회는 홀로코스트 같은 인류 역사상 가장 야만적인 범죄들이 벌어진 2차 세계 대전을 반성합니다. 세계인권선언문은 그 결과로 태어났지요. ‘인권에 대한 무시와 경멸이 야만적 행위를 야기’했다는 성찰과 ‘언론과 종교의 자유, 공포와 결핍으로부터의 자유를 인류 전체가 누릴 수 있는 세상’이 도래하길 바라면서요. 세계인권선언과 관련한 잊지 못할 ‘추억’이 하나 있습니다. 2008년, 세계인권선언 60주년이 되는 해였지요. 유엔은 ‘Know Your Rights 2008’ 캠페인을 전개하였고, 세계적으로 축하 행사가 잇따랐습니다. 우리나라도 ‘세계인권선언 60만 읽기 캠페인’ 같은 다채로운.. 더보기 [경향신문]강용주 “인간의 자존심과 정체성을 지키고 싶었다” 옛날 광부들은 갱에 들어가기 전 카나리아를 먼저 안으로 날려보았다. 먼저 날아들어간 카나리아의 소리가 들리면 갱이 안전하다는 뜻이고, 카나리아가 울지 않으면 유독가스에 중독되어 죽은 것이라 여기고 광부들은 그 갱도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한다. 카나리아는 자신의 생사를 걸고 광부들에게 위험신호를 보냈던 것이다. 강용주씨(48)는 스스로를 “뒤집어진 광산의 카나리아”라고 했다. 1985년 구미(歐美)유학생간첩단 사건에 휘말려 고문에 못이겨 거짓 자백을 한 뒤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운동권 학생, 14년 동안이나 복역하면서도 준법서약을 거부한 비전향수, 국가보안법을 위반해 출소한 뒤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받는 보안관찰 처분자. 이런 ‘신분’인 자신과 같은 사람들의 자유가 최대한 보장될 때 만인의 자유가 똑같이 보장될.. 더보기 강용주를 다시 만났다. 강용주를 다시 만났다 지난 9월 22일, 나는 광주에 가는 길에 강용주를 다시 만났다. 그의 어머니 조순선씨도 함께인 자리였다. 5 년만이었다. 이제 그는 43살, 어머니는 79살이 되었다. 어머니의 말대로 그는 23 년만에야 의대를 졸업하고, 이제 인턴으로서 나주의 한 병원에 근무하고 있다. 사실 그와 나는 겨우 네 번째의 만남이었고, 그것도 세 번은 1999년 2월과 3월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5 년만에 처음 만난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가, 아주 어린 시절 꾀를 벗고 알아온 '꾀복쟁이' 친구처럼 가깝게만 느껴졌다. 오랜 학교 공부하는 데 힘들지 않았냐니까, 예의 '나이 영치론'을 들고 나온다. "나이 먹은 체 하면 요즘 애들이 안 끼워주잖아요. '왕따'되는 거죠. 그런데 저는 14년 동안 .. 더보기 이전 1 2 3 4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