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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연합뉴스] <세월호참사> 강용주 광주 트라우마센터장의 조언 "지금은 섣불리 상담이나 치유를 논할 수도 없는 단계입니다. 당사자·가족과 충분히 슬퍼하고, 분노하고, 공감하고 그들을 지지해야 합니다." 광주 트라우마센터는 필요에 따라 가족 등의 트라우마를 완화·치료하는 데 필요한 지원을 아끼지 않을 방침이다.광주 트라우마센터는 5·18 민주화운동 관련자, 고문 피해자 등과 그 가족의 치유를 위해 2012년 10월 국내 최초로 설립됐다.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4/04/28/0200000000AKR20140428083700054.HTML 더보기
[한겨레 토요판] 몸(21) 고문생존자 강용주의 상처 고문생존자에게 ‘치유’란 어떤 의미일까. 강씨는 ‘타자화된 몸을 다시 내 안으로 받아들여 사랑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고문을 당하면 이미 내 몸이 자기 것이 아니에요. 짓밟히고 부서져 타자화된 몸이 되죠. 몸이 가져오는 고통이 자기 존재를 부정하게 만들고, 이 죄책감은 평생 남아요. 고문생존자들이 가해자에게 책임을 묻기보단, 스스로 고문을 이기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안고 살아요. 그렇기 때문에 타자화된 내 몸을 다시 내 안으로 받아들이고 몸과 나 자신을 다시 통일시킬 필요가 있어요. 그러기 위해선 내가 내 몸을 사랑해야 하죠. 그리고 이 과정에서 꼭 필요한 것이 안전한 신뢰관계입니다.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의 연대와 애정이 그들을 치유로 이끌 수 있어요.” http://www.hani.co.kr/arti.. 더보기
[공동선] 통권 112호 연재 그 사람 - "진실의 힘"과 강용주 강용주의 ‘양심 지키기’는 처연한 고행이었다. 교도소 안에서 젊은 강용주는 병약한 장기수 노인들의 손발이 되어 청소와 빨래 등 궂은일을 도맡아하면서 그들과 함께 민주화와 전향제도 폐지, 양심수 석방을 위한 옥중투쟁을 전개했다. 1998년 7월 1일, 양심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이유로 사상전향제도가 폐지되고 준법서약제도가 도입되었다. 그해 8월 15일 대통령의 특별사면 때 김대중 정부는 “죄 짓고 들어온 사람을 내보내는데 서약서는 최소한의 요구”라면서 석방대상자들에게 준법서약서를 요구했다. 그러나 강용주는 이를 단호하게 거부했다. 그와 함께 재판 받은 사람들은, 사형을 선고 받았던 사람까지도 13년 2개월 만에 모두 석방되고 그만 남았다. 이렇게 하여 그는 전향서나 준법서약서 같은 것을 쓰지 않고 14년간을.. 더보기
[전라도닷컴]자신의 상처를 통해 시대의 상처를 보듬다 광주트라우마센터장 강용주 고문을 통해 간첩누명을 쓰고, 청춘을 감옥에 반납한 깊은 상처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상처를 통해 남의 상처, 시대의 상처를 보듬는 힘을 얻었다는 의사 강용주. 지난 해 가을 광주에 설립된 트라우마센터의 운영을 맡고 있는 그는 ‘상처받은 사람들의 치유’와 ‘시스템의 치유’는 정치 경제 역사의 모든 문제를 ‘사람 중심’으로 바라볼 때 가능한 일이라고 말한다. “민주정부가 들어서고도 15년이 지난 후에야 치유사업이 시작됐다는 사실은 부끄러운 일이죠. 고통 받은 이들의 아픔을 생각지 않는 과거청산은 말이 안 되는 일 아닙니까. 지역 대학들과 연계하거나 사회의 전문가들과 연계해서 치유센터로서 전문성을 강화시켜 나가야 하고, 전문성 담보를 통한 독립적 운영 등 아직 숙제가 많습니다. 영국의 경우에는 난민들을 위.. 더보기
[news1] 광주시청자미디어센터, 26일 강용주 광주트라우마센터장 특강 1962년 광주출생인 강용주 광주트라우마센터장은 1980년 5월 고교 3학년 재학중 광주민중항쟁 참여, 1985년 구미유학생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최연소 비전향 장기수로 14년간 복역했다. 이후 2008년부터 현재까지 고문피해자치유모임인 '진실의 힘'과 UN 고문피해자 지원의 날 기념대회 조직에서 활동중이다. http://m.zum.com/news/society/3778907 더보기
[프레시안] 최연소 비전향 장기수, 그의 마르지 않은 눈물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4647 강용주 광주 트라우마 센터장 마지막 순간 두려움에 총을 버리고 도망갔던,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에 어쩔 줄 모르던 그 고교생이 고교 선배에게 학생운동, 노동운동, 민주화운동에 관한 자료를 주었다는 이유로 85년 구미유학생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우리나라 최연소 장기수이자 세계 최연소 무기수가 되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사면을 받고 나오는 순간에도 전향서에 사인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세상에 나오지 못했다. "전 향하지 않았던 이유는 단순했다. 간첩사건이 조작이라 인정할 수 없었고 재판과정에서 변변히 항변해 보지 못한 것이 억울했다. 또한 전두환 정권이라는 광주 민주화의 학살자들에게 또다시 반성한다고 할 수는 없었다. 고.. 더보기
[경향신문]강용주 “인간의 자존심과 정체성을 지키고 싶었다” 옛날 광부들은 갱에 들어가기 전 카나리아를 먼저 안으로 날려보았다. 먼저 날아들어간 카나리아의 소리가 들리면 갱이 안전하다는 뜻이고, 카나리아가 울지 않으면 유독가스에 중독되어 죽은 것이라 여기고 광부들은 그 갱도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한다. 카나리아는 자신의 생사를 걸고 광부들에게 위험신호를 보냈던 것이다. 강용주씨(48)는 스스로를 “뒤집어진 광산의 카나리아”라고 했다. 1985년 구미(歐美)유학생간첩단 사건에 휘말려 고문에 못이겨 거짓 자백을 한 뒤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운동권 학생, 14년 동안이나 복역하면서도 준법서약을 거부한 비전향수, 국가보안법을 위반해 출소한 뒤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받는 보안관찰 처분자. 이런 ‘신분’인 자신과 같은 사람들의 자유가 최대한 보장될 때 만인의 자유가 똑같이 보장될.. 더보기
강용주를 다시 만났다. 강용주를 다시 만났다 지난 9월 22일, 나는 광주에 가는 길에 강용주를 다시 만났다. 그의 어머니 조순선씨도 함께인 자리였다. 5 년만이었다. 이제 그는 43살, 어머니는 79살이 되었다. 어머니의 말대로 그는 23 년만에야 의대를 졸업하고, 이제 인턴으로서 나주의 한 병원에 근무하고 있다. 사실 그와 나는 겨우 네 번째의 만남이었고, 그것도 세 번은 1999년 2월과 3월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5 년만에 처음 만난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가, 아주 어린 시절 꾀를 벗고 알아온 '꾀복쟁이' 친구처럼 가깝게만 느껴졌다. 오랜 학교 공부하는 데 힘들지 않았냐니까, 예의 '나이 영치론'을 들고 나온다. "나이 먹은 체 하면 요즘 애들이 안 끼워주잖아요. '왕따'되는 거죠. 그런데 저는 14년 동안 .. 더보기
[광주일보] 세계 최연소 장기수 강용주 의사 됐다 광주일보 2004년 01월 16일 입력 세계 최연소 장기수로 14년 동안 복역했던 강용주(43)씨가 `2004년 제 68회 의사 국가시험''에 합격했다. 수의 대신 흰색 가운을 입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강씨는 지난 99년 2월 형집행정지로 나온 뒤 전남대 의대에 복학해 본과 4학년으로 지난 8-9일 이틀간 치러진 의사 고시에 응시, 16일 새벽 합격통보를 받았다. 강씨는 “시험 전날인 지난 7일 광주지검에서 보낸 보호관찰 처분 갱신 결정서가 시험을 잘 볼 수 있도록 해준 것같다”면서 “6년동안 곁에서 도와준 교수님들과 친구·후배들이 고마울 뿐”이라고 말했다. 7일 새벽 술자리에서 휴대폰 메세지로 `합격 통지''를 받자마자 옥바라지를 하며 늙어버린 어머니(79)에게 감사의 전화를 했다고 강씨는 덧붙였다... 더보기
[한겨레 프리즘] 킬링 아사드, 힐링 강용주 / 조일준 #힐링(치유) “고문은 한 사람의 영혼에 죽음을 각인시키는 행위다. … 힐러리는 ‘아이 하나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나는 ‘고문 생존자가 다시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 정상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선 온 사회의 힘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다.”(강용주, 인터뷰) 의사 강용주(50)는 그 자신 모진 고문의 피해자다. 전남대 의대 재학 때인 1985년 이른바 구미유학생간첩단 사건으로 잡혀가 온갖 혹독하고 야만적인 고문 끝에 허위자백을 하고 사형 구형에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앞서 1980년 5월 그는 대학입시를 앞둔 고3이었다. 광주항쟁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던 계엄군의 만행에 분노해 책 대신 총을 들었다. 5월27일 새벽 계엄군이 최후의 살육을 위해 전남도청에 들이닥쳤을 때, 그는 “너무 무서워 .. 더보기